1화. 반쯤 남은 아메리카노중앙도서관 3층, 창가 끝자리는 리사의 자리였다. 시험 기간이든 아니든, 리사는 늘 그곳에 있었다. 노트북 화면에는 두 개의 문서가 나란히 떠 있었다. 하나는 자신의 경영학원론 리포트, 다른 하나는 에릭의 리포트였다."리사, 내 거 내일 아침까지 되지?"고개를 들기도 전에 익숙한 향수 냄새가 먼저 닿았다. 에릭은 늘 그랬다. 인사 대신 용건이 먼저였다. 농구부 트레이닝복 차림에 젖은 머리를 대충 넘긴 모습이었지만, 도서관 안의 시선이 전부 그쪽으로 쏠렸다."응, 거의 다 했어. 참고문헌만 정리하면 돼.""역시. 너밖에 없다니까."에릭이 리사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었다. 그 짧은 손길 하나에 리사의 하루가 환해졌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에릭이 자신을 찾는 건 과제가 밀렸을 때, 출석 대리가 필요할 때, 시험 족보가 필요할 때뿐이라는 걸. 그래도 '너밖에 없다'는 말은 매번 진짜처럼 들렸다."아, 그리고 이번 주 토요일에 과 파티 있는데."리사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혹시—"그날 내 대신 팀플 회의 좀 들어가 줄래? 내가 좀 바빠서.""……응. 알았어."에릭은 반쯤 남은 아메리카노를 리사의 책상 위에 내려놓고 떠났다. 선물이라기보다는 버리고 간 쪽에 가까웠다. 리사는 식어버린 컵을 한참 바라보다가, 그래도 버리지 못하고 한 모금 마셨다. 썼다.그 주 금요일, 경영학과 강의실이 이상하게 술렁였다."편입생이래. 미국에서 왔다던데."
"수영 국가대표 상비군이었다는 얘기도 있어."
"얼굴 봤어? 진짜 미쳤어."리사는 관심 없다는 듯 맨 앞줄에 앉아 교재를 펼쳤다. 남의 소문보다 다음 주 중간고사 범위가 더 중요했다. 그때, 뒤에서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리사? 너 리사 맞지?"돌아본 순간, 리사는 숨을 멈췄다.키는 에릭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컸다. 넓은 어깨, 햇볕에 그을린 피부, 단정하게 걷어 올린 셔츠 소매 아래로 드러난 단단한 팔. 낯선 얼굴이었다. 그런데 웃을 때 왼쪽 눈가가 먼저 접히는 버릇만은, 이상하게 익숙했다."나야. 제임스. 옆집 살던. 너희 집 앞 놀이터에서 맨날 울던 애.""……제임스? 그 땅꼬마 제임스?"강의실 안의 시선이 일제히 리사에게 꽂혔다. 제임스는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리사의 옆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땅꼬마는 좀 너무하다. 열두 살 이후로 30센티 컸어.""연락도 없이 갑자기 가버려서, 난 네가……""미안. 그때 너한테 인사도 못 하고 간 게 제일 후회됐어." 제임스가 잠시 말을 고르다가, 작게 웃었다. "그래서 돌아올 학교도 여기로 골랐지."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리사가 대답을 찾기도 전에, 제임스는 그녀의 책상 위를 보았다. 빼곡하게 적힌 필기, 그리고 구석에 놓인 식은 커피 컵."넌 여전하네. 공부만 하고, 밥은 거르고."그는 가방에서 포장도 뜯지 않은 샌드위치 하나를 꺼내 리사 앞에 놓았다."수업 끝나고 같이 점심 먹자. 할 얘기가 8년 치는 밀려 있거든."강의실 뒷문에 기대 서 있던 에릭은, 처음으로 리사가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향해 웃는 얼굴을 보았다.그리고 그 웃음이 생각보다 훨씬 예쁘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다.에릭은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쳤다가 지웠다. 다시 쳤다.[토요일 과 파티, 너도 와. 팀플은 내가 갈게.]전송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이, 이유 없이 조금 굳어 있었다.
